갈라디아서 · 에베소서 · 빌립보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갈라디아서 · 에베소서 · 빌립보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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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는 신약의 바울 서신서 가운데 길이는 짧지만 내용은 풍성한 책들이다. 세 권 모두 간결한 서신이기 때문에 일의 신학에 대한 이들의 가르침을 한데 묶어 다루었다. 그러나 세 서신서는 각각 독특한 주제를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 각각을 개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갈라디아서 개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우리는 신자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세주로 믿을 때 크리스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면, 일을 포함한 일상에서 이 믿음을 어떻게 표현해 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특정 기본 규칙에 맞춰 행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직장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행동 목록을 정해 놓을 수 있다. (1) 동료들을 존중한다. (2) 부적절한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3)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4) 의사결정을 할 때는 성경적 가치관을 따른다. (5) 가능한 그리스도의 신앙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목록은 더 늘어날 수 있으며, 그때 성경적 우선순위를 반영한 소중한 지침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직장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이런 목록에는 위험이 따른다. 크리스천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유로운 반응이어야 하고, 더불어 그리스도에 중심을 둔 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목록’에 지나치게 얽매이다 보면 자칫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크리스천의 삶을 율법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그 목록에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AD 1세기 중반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서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갈라디아 교인은 해야 할 행위와 하지 말아야 할 행위의 목록에 따라 삶의 방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부르며 당시 특정학파가 해석하는 방식대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주장하던 외부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였다. 특히 이 ‘유대주의자들’은 할례(갈 5:2-12)와 의식법(갈 4:10) 문제에서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갈라디아서라고 부르는 이 서신을 썼다. 바울은 직장과 관련된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크리스천 삶의 본질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우리의 신앙과 일에 관해 예리하게 말한다. 더욱이 갈라디아서는 일과 연관된 이미지, 특히 1세기 노예제도 관습에서 비롯된 모습을 포함한다. 바울에 따르면 크리스천들은 모세의 율법이나 이 땅의 다른 힘 아래에서 종 노릇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만 한다(갈 4:1-11).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사랑을 통해 “서로 종 노릇”(갈 5:13) 하기로 작정해야 한다.

 

  성경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저자는 바울이며, 이 서신이 AD 49년에서 58년 사이 오늘날의 터키 중부 지방에 해당하는 로마제국의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에 이 서신을 썼다는 데 거의 만장일치로 의견을 같이한다.[1]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통해 개척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 교회들은 문화적 · 종교적으로 다양한 환경 가운데 존재했고, 특히 최근에는 유대주의자, 즉 모든 크리스천들이 온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경험하고 싶다면 모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변질시키고 있던 유대주의자들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주장에 맞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자유를 강조했다. 이를 직장에 적용해 보면, 갈라디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필수적인 자유를 가지고 우리가 일을 이해하고 그 일에 종사하도록 도움을 준다.

 

에베소서 개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총체적인 관점에서 우리 일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일은 그저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활동인가? 아니면 의미와 치유, 개인적 통합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한가?[2] 하나님의 우주 창조속에서 우리 일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우리 일이 그리스도의 세상 구속 사역과 병행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에베소서는 창세 전에 시작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계속되었으며 현재의 이 순간과 그 너머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장엄한 사역을 다룬다. 에베소서는 우리를 경외감에 사로잡힌 관찰자로서, 동시에 하나님 사역의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이 장엄한 계획에 끌어들인다.

 

  따라서 에베소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삶, 우리의 행동, 그리고 실로 우리의 일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던 일과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 때문에 다르게 살고, 다르게 예배하며, 다르게 일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반응하기 위해 또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하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는 삶에서 직업을 포함한 맡은 바 모든 일을 해 나간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엡 4:1).

 

  우리가 에베소서라고 알고 있는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쓴 신약의 다른 서신들과는 유사하기도 하고 동시에 다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골로새서와 가장 유사한데, 두 서신은 주제와 구조, 심지어는 문장까지 비슷하다(엡 6:21-22; 골 4:7-8). 이 책의 5장을 보라.

  
   에베소서는 빼어난 문체, 독특한 어휘들, 그리고 특유의 신학적 관점 등에서 다른 바울 서신들과 차별화된다. 더 나아가 에베소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 비해 특정 교회의 특정 상황을 다루는 경향이 훨씬 덜하다.[3] 본 해설에서는 저자가 바울이라는 전제하에 내용을 전개한다.

 

  에베소서는 특정 회중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주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일을 광대한 신학적 관점과, 그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담당하는 핵심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각 개별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로서(엡 2:10), 그리고 교회의 성장과 사역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서(엡 4:15-16), 하나님의 일에 기여한다.

 

빌립보서 개요

   일은 노력을 요구한다. 장사를 하든, 트럭을 운전하든, 아이를 키우든, 글을 쓰든, 신발을 팔든, 아니면 장애인이나 노인들을 돌보든, 우리가 하는 일은 저마다 노력해야 가능하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출근하지 않으면 일을 마무리할 수 없다. 매일 아침 당신을 침대에서 일어나게 해 주는 동기는 무엇인가? 하루 종일을 버텨 나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당신이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나아가 탁월하게까지 해내게 하는 에너지원은 무엇인가?

 

  매우 다양한 답들이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필요 때문에 일을 한다. “저는 돈이 필요해서 매일 일어나 일하러 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일이 좋아서 일한다. “제가 일하는 이유는 제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시시콜콜한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저를 깨워서 하루 종일 견디게 해 주는 게 뭐냐고요? 바로 카페인이죠!”
 

  빌립보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우리가 일을 하는데 힘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대답을 제시해 준다. 바울은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직업을 포함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표현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런 노력을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며(막 10:35),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섬김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 주신다.

 

  우리가 빌립보서라고 알고 있는 이 서신을 사도 바울이 대략 AD 54년에서 62년 사이에 기록했다는 데 거의 모든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한다.[4] 몇 번의 투옥기간 중(빌 1:7) 어느 때에 이 서신을 기록했다는 것은 알지만, 기록 장소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5]

 

바울이 초기 선교 여행에서(빌 1:5; 행 16:11-40) 자신이 세운 공동체인 빌립보 교회에 이 개인적 서신을 써 보낸 것은 확실하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자신의 최근 소식을 알려주며, 자신의 사역을 후원해 준 일에 감사를 표하고, 신앙을 위협하는 많은 일들에 그들이 대항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며, 그들이 서로 더 잘 지내도록 돕고, 전반적으로는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살아 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


   빌립보서는 ‘일’(work; 헬라어로 ergon과 cognates)이라는 단어를 몇차례 사용한다(빌 1:6; 2:12-13, 30; 4:3).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과업을 묘사하기 위해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세상 일터와 관련된 문제들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바울이 말하는 일과 관련한 내용은 여기에 요긴하게 적용할 수 있다.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The Word Biblical Com  mentary (Waco: Word, 1990), lxxiii–lxxxvii를 보라.

예를 들어 Dan P. McAdams, The Redemptive Self: Stories Ameri  cans Live B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Donald E. Polkinghorne, Narrative Knowing and the Human Science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88)를 보라.

이 쟁점들과 그들이 시사하는 바를 논의한 내용은 Andrew T. Lin  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90), xlvii–lxxiv. 앤드류 T. 링컨, 《WBC 에베소서》(솔로몬 역간); Gerald F. Hawthorne, Ralph P. Martin, and Daniel G. Reid, eds., “4.3. Place and Date” of “Philippians, Letter to the,”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를 보라.

 Gerald F. Hawthorne, Philippians, rev. and exp. by Ralph P. Martin, The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xxvii–xxix, xxxix–l.

 Gerald F. Hawthorne, Ralph P. Martin, and Daniel G. Reid, eds., “4.3. Place and Date” of “Philippians, Letter to the,”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를 보라.

갈라디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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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서신 도입부에서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있던 문제점, 즉 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갈 1:6)을 지적한다. 이 ‘다른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답게 살 것’(갈 2:14)을 요구한다. 이 ‘복음’이 진짜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자서전(갈1:10-2:21), 믿음으로 받는 성령(갈 3:1-5), 믿음으로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갈3:6-29), 종과 아들의 비유(갈 4:1-11),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호소(갈 4:12-20),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비유(갈 4:21-31) 같은 다양한 주장들을 제시한다.


   바울은 1-4장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어떠한지 강조하기 위해 ‘종’이라는 단어와 이미지를 사용한다. 갈라디아서에서 ‘종’은 기본적으로 자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종 노릇에서 벗어났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갈 4:7).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의지하기보다 모세 율법을 따르고자 했던 것은 사실상 다시 종의 속박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갈 4:8-10). 모세 율법 역시 제대로 이해한다면 율법 그 자체의 종 노릇 하는 것보다는 자유를 더 권면한다(갈 4:21-31).


   바울은 종교적 율법주의에 대한 영적 가르침을 보여 주기 위해 종(노예)이라는 일터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직장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상사가 직원의 모든 행동과 말, 생각을 통제하려고 하는 율법적인 직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는 반대가 된다. 모든 유형의 근로자는 자신들의 합법적 상사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모든 유형의 조직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근로자에게 허용할 의무가 있다.

당신도 ‘다른 복음’을 따르는가 (갈1:6-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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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서신 도입부에서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있던 문제점, 즉 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갈 1:6)을 지적한다. 이 ‘다른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답게 살 것’(갈 2:14)을 요구한다. 이 ‘복음’이 진짜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자서전(갈1:10-2:21), 믿음으로 받는 성령(갈 3:1-5), 믿음으로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갈3:6-29), 종과 아들의 비유(갈 4:1-11),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호소(갈 4:12-20),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비유(갈 4:21-31) 같은 다양한 주장들을 제시한다.


   바울은 1-4장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어떠한지 강조하기 위해 ‘종’이라는 단어와 이미지를 사용한다. 갈라디아서에서 ‘종’은 기본적으로 자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종 노릇에서 벗어났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갈 4:7).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의지하기보다 모세 율법을 따르고자 했던 것은 사실상 다시 종의 속박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갈 4:8-10). 모세 율법 역시 제대로 이해한다면 율법 그 자체의 종 노릇 하는 것보다는 자유를 더 권면한다(갈 4:21-31).


   바울은 종교적 율법주의에 대한 영적 가르침을 보여 주기 위해 종(노예)이라는 일터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직장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상사가 직원의 모든 행동과 말, 생각을 통제하려고 하는 율법적인 직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는 반대가 된다. 모든 유형의 근로자는 자신들의 합법적 상사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모든 유형의 조직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근로자에게 허용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삶 (갈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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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는 자유에 대한 힘찬 호소와 함께 첫 네 장에서의 점증적 논증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죄스러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그와 정반대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의 율법을 포함해 이 세상과 그 힘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자유 안에서 크리스천들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겸허함으로 서로 섬기기로 작정해야 한다. 이러한 ‘종 노릇’은 속박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생활하기(갈5: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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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크리스천들에게 성령이 함께하시고(갈 3:2-5), 이 성령은 우리가 매일 믿음대로 살도록 도와준다(갈 5:16). 성령으로 사는 자들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육체의 일”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갈 5:19-21). 특히 이 목록에서 분쟁, 시기, 화냄, 당파 짓는 것, 분열, 투기 등은 여러 직장에서의 삶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다. 우상숭배나 주술 같은 종교적 항목들도 직장에서 실제로 나타난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일터에서 역시 성령 안에 살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방종’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고한다(갈 5:13). 대신 우리는 “서로의 종[또는 노예]이 되기로” 작정해야 한다. 이 가르침을 직장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동료들과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더라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분한 마음을 쌓기보다는 시기나 화냄, 당파 짓는 것, 분열, 투기에 정면으로 맞서 공정하게 해결해야 한다(마 18:15-17). 고객들의 합당한 기대를 뛰어넘는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종은 자신이 섬기는 사람을 위해 단순히 적절한 수준을 넘어 최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하지 말아야 할 항목들만 얘기하면서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새로운 태도와 행동을 만들어 낸다. 농업에서 열매는 오랜 기간 경작하여 얻은 달콤한 결과다. ‘성령의 열매’라는 은유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하는 일보다는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지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온유, 자비, 충성, 양선, 절제’(갈 5:22-23) 등을 함양해 나가야 한다. 교회와 가정 안에서 크리스천들 간의 관계에만 이 열매들을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듯이, 직장을 포함해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성령의 열매를 보여 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의 인내는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혹은 실패하는 동료를 견뎌 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장에서의 인내는 성급하게 행동하도록 유혹하는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홧김에 부하 직원을 해고하거나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보지도 않고 동료를 호되게 질책하는 일, 또는 학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거나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를 자르는 등의 성급함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성령의 열매가 일과 거의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영적 열매의 범위를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훈련 (갈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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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6장 전반부는 크리스천들에게 어떻게 가시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일과 연관된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한다. 크리스천들은 ‘짐을 서로 지며’(갈 6:2) 서로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핑계 삼아 우리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신자들은 ‘각각 자기 일을 살피고’,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갈 6:4-5).


   뿌리고 거두는 비유를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육체보다는 성령의 삶에 초점을 맞추라고(갈 6:7-8) 권면한다. 성령의 씨를 뿌리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와 같이 목적의식이 있는 노력을 수반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동료 교인들을 돌보는 것에 더해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도 수고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면, 이를 행해야 하는 장소는 바로 직장이다.

복음의 중심, 그리스도의 십자가(갈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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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맺음말에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쓰며,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의 중심,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상기시킨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 신학적 비전 (엡1: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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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전반부는 온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장엄한 구속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세상에서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하셨다(엡 1:4-6). 이 목적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엡 1:10).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때 죄 때문에 깨졌던 온 우주를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은 농장, 학교, 회사를 포함한 이 세상 전부가 하나님께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 회복의 역사는, 하나님 은혜를 받아 그분의 은혜로운 회복 사역에 동참하는 일꾼으로서 우리 인류를 포함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엡 2:8-9). 그러나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 지극히 중요하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포함한 행위들은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역사의 일부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우리가 하는 활동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요소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탁월하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개인적 구원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엡 2:4-7),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갈라진 틈을 메워 놓았다(엡 2:13-18). 예전에 원수였던 이 둘의 연합은 하나님 화해의 사역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의 본질과 궁극적 성공을 온 우주에 증명해 보이는 역할을 한다(엡 3:9-10). 그러나 교회는 종교적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사람들의 연합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함께 또는 각자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엡 3:20)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크리스천을 묘사하기 위해 ‘예배자’라는 종교 용어가 아닌 “시민”(엡 2:19)이라는 일반 용어를 쓴다. 곧 살펴보겠지만, 실제로 에베소서는 교회가 모일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은 거의 제시하지 않고, 교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만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 실질적 지침 (엡4: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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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후반부는 서신 전반부에서 가르친 비전대로 살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모든 크리스천은 이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심오한 소명(vocation; ‘calling’에 대한 라틴어에서 유래)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다층적인 계획을 진전시키기 위해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 부르심이 우리의 일, 때로 우리가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것을 규정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삶을 살라는(엡 1:12) 근본적인 부르심을 표현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체적인 직업으로 부르실 수도 있다. 따라서 의사로서, 변호사로서, 사무원으로서, 웨이터로서, 배우로서, 음악가로서, 부모로서, 조부모로서,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대로 그분의 세상에서 하시는 사역에 합당하게 우리는 살아야 한다.

 

선과 구제를 위해 열심히 일하기 (엡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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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4-6장의 실질적인 권면 가운데 두 단락이 일과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 첫 번째는 일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비록 도둑질하는 자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바울의 충고는 모든 크리스천과 관련이 있다. 이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to agathon[토 아가톤]’은 문자 그대로 ‘선이 되도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크리스천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직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많은 선한 일을 해 나가는 핵심 무대다(엡 2:10).


   우리는 일을 통해서 직접이든, 교회 혹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자원들을 얻는다. 일의 신학이 자선의 신학과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이 구절은 분명하게 그 둘을 연결시킨다. 일의 목적은 일에서 성취한 바를 통해 직접, 또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게 된 바를 통해 간접으로 선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이 전체적인 메시지다.

관계에 대한 지시 (엡5: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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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실질적인 주제는 관계다. 크리스천으로의 부르심은 우리의 기본 관계, 특히 가정과 직장 내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산업시대 이전에는 한 가정이 가족생활의 터전이면서 동시에 일의 터전이기도 했다.) 에베소서 5장 21절부터 6장 9절은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종과 상전 등 한 가정 내에서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포함함으로써 이 요점을 강조한다. 이런 종류의 목록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도덕적 담론에서는 일반적이었고, 신약에서도 나타나 있다(골 3:18-4:1; 벧전 2:13-3:12).6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는 에베소서 6장 5-9절을 주의 깊게 보자. 바울은 신앙을 가진 상전들에게, 크리스천 상전들 밑에 있는 종들(slaves)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상전들 밑에 있는 종들에게 말한다. 이 본문은 골로새서의 병행 구절(골 3:22-4:1)과 아주 유사하다. 에베소서의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1세기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에 관한 역사적 배경은 이 책 5장을 보라. 

 

   간단히 요약하면 로마의 종(노예)과 21세기의 임금 근로자를 비교했을 때 유사점과 차이점이 모두 있다. 가장 큰 유사점은 고대 노예나 현대 근로자들 모두 주인이나 감독관의 권위하에서 일한다는 것이다. 일 자체와 관련해서 보면 두 집단 모두 자신의 일에서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대 그리고 현대 노예들 모두 일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주인에게 예속돼 있다는 것이다. 노예는 그만둘 수가 없으며, 법적인 권리와 부당처우에 대한 해결책이 제한되어 있고, 일에 대한 급여나 보상을 받지 못하며, 근로 조건에 대한 협상의 여지가 없다. 요약하자면, 노예들에 대한 주인들의 권력 남용이 근로자들에 대한 감독관의 권력 남용보다 그 범위가 훨씬 더 넓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이 본문이 실제 노예들에게 적용된 것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늘날의 발전된 경제에서 지배적인 직업 형태인 임금 근로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The Anchor Bible Dictionary(New York: Doubleday, 1992)에 실린 데이비드 노엘프리드먼이 쓴 “Haustafeln” and “Household Codes”를 보라.

‘진정한 주인’을 섬기는가 (엡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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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는 종들에게 그들의 인간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열심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들’로 스스로를 바라보라고 권면한다(엡 6:6-7). 그들이 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당신의 상전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할 때 위안이 된다. 종의 경우에는 늘 그렇듯(눅 17:8) 주인이 보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이다(엡 6:8).


   그러나 이 땅의 주인을 위해 종살이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엡 6:6) 분명히 주인은 종에게 다른 종을 학대한다든가, 고객을 속인다든가, 다른 사람의 밭에 몰래 침입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종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만 자기 주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 만약 주인이 종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한다면, 종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경우 바울의 말은 정말 힘든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명령 거부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명령은 피할 수가 없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주님의 명령은 어떤 주인의 명령보다 우선한다. 실로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와 상충하는 모든 명령들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성실한 마음으로”(엡 6:5)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지상의 주인에게 불순종함으로써 받는 처벌은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주께 하듯”(엡 6:7) 하기 위해서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한 분을 섬긴다 (엡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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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이 종에게 주인과 그리스도 가운데 누구에게 순종할지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인들에게 그들의 종에게 하는 위협을 그치라고 말한다(엡 6:9). 만약 당신이 종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했다면, 위협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종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했다면, 당신이 가하는 위협은 마치 그리스도에 대한 위협과 같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이 땅의 상전들은 그들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신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종과 상전들 모두 ‘같은 상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엡 6:9). 이런 이유 때문에 상전들은 ‘자신의 종들에게도 똑같이 하라’(엡 6:9)고 에베소서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종들에게 명령할 때 마치 주님께 또는 주님을 위하여 명령하듯 하라는 말이다. 이를 따른다면, 어떤 크리스천 상전도 종에게 악한 행위나 심지어 지나친 일도 명령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의 종과 주인의 구별은 그대로일 수밖에 없지만, 이들의 관계는 유례가 없는 상호협력하라는 부르심 덕분에 변화되었다. 양쪽 다 “성실한 마음으로”(엡 6:5) 주님께만 복종해야 한다.

 

  양쪽 다 상대를 지배할 수도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엡 6:7). 어느 쪽도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이 단락은 노예제도의 경제적 · 문화적 실체를 수용하고 있으나, 동시에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풍성한 씨앗을 품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종도 자유인도 없다’(갈 3:28).


   오늘날은 노예제도를 흔히 인신매매 또는 강제노동으로 부른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예제도가 번창하고 있다. 에베소서의 전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6장 5-9절의 내면적 논리는 노예제도의 종식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전으로서든 종으로서든 개인적으로 노예제도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갖는 직장관계 안에 놓여 있다. 에베소서 6장 5-9절은 비유를 통해 상사와 직원 모두에게 명령하라고 가르치며, 그리스도에 의해 또는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질 수 있는 일만 행하고 보상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선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항상 쉬운 건 아니지만 문제는 간단하다. 상사, 고객, 감독관, 또는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상이나 칭찬을 해주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가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이 땅의 상전들에게도 복종하라.” 그리스도께 경솔하게 불순종할 수 없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에게도 경솔하게 불순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부 고발, 파업, 규제 당국을 향해 하는 항의 등이 크리스천 근로자들로서 정당한 행위인가? 견해나 판단의 차이 자체가 정당한 명령에 불순종할 충분한 명분은 되지 못한다.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상사가 나한테 이 일을 하라고 하는 건 불공평해’라는 생각과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야’라는 생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 땅의 주인들에게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내린 지시를 이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을 만한 강력한 이유가 없는 한, 단순히 불공평하다거나 부담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지시에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이 땅의 상전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방식으로 하라고 덧붙인다. 성경의 명령이나 가치와 상충되는 등,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라는 지시를 받는 경우, 우리의 더 높으신 주인(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인간 상사가 내린 경건치 않은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점도 분명하다. 그런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누구의 이익이 관철되는지가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만약 불순종하여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때는 불순종해야할 더욱 강한 명분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불순종이 우리의 경력에 치명적이거나, 더 심할 경우 생계마저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바울이 우리에게 “주 안에서 …… 강건하여지고 ……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라고 권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명령을 순종하거나 아니면 해고와 같은 개인적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 때로는 우리 자신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진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는 바다. 특히 경제적 사다리의 가장 아래에 있어 다른 대안이나 재정적 완충장치가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근로자들은 일상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졸렬하고 악한 행위를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가령 “나 사무실에 없다고 해 줘” 등의 거짓말, “16번 테이블 손님들 많이 취해서 눈치도 못 챌 테니 주문 안 한 술 한 병 더 가져다 놔” 같은 속임수, “이 일이 이 세상에서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해 주길 바라네” 같은 우상숭배 등의 명령이다. 이 모든 명령들을 우리는 모조리 거부해야 할까?

 

  어떤 경우에 근로자들은 정말 심각한 악행을 저지르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름에 먹칠을 해 버린다고 협박해!”라든가, “그 사람이 가짜 품질 평가 기록을 찾아내기 전에 그를 해고시킬 명분을 찾아봐!” 또는 “오늘 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강에다 쏟아 부어 버려!” 같은 명령을 받을 수 있다.

 

  직업을 잃고 우리 가족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쪽을 택하는 것은 경건치 않은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일처럼 느껴지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성경적 가치에 더 또는 덜 부합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는 그런 결정이 상당히 복잡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잘못된 일을 하라는 압박을 받을때,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강하게 악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직장 내에서 모든 악을 다 이겨 내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되면, 우리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긍휼과 용서의 말을 건넬 필요가 있다.


   권위를 가진 당사자라면,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실 법한 일만 지시해야 한다. 우리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부하 직원들에게 그들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가하는 명령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선한 양심을 가졌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명령해서는 안 된다. 양심이나 정의에 근거해 우리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협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누군가의 상사라 하더라도 우리 역시 위에 상사가 있으며, 권위를 가진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철저한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그리스도에 반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반대로 복종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직장에서의 직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반대로 거스르는 방편이 된다.

빌립보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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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b-13)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 (빌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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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입부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서(빌 1:3-11),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 안에서 또 그들 가운데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얼마나 확신하는지 나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역을 의미한다. 바울 자신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직접 그 일에 참여했다. 바울은 그들의 스승과 사도로서 그 일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러한 일을 “내 일의 열매”(빌 1:22)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의 근원이 되는 일꾼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빌 1:6)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빌 1:28, 새번역).


   NRSV 역본은 “among you”(너희 가운데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 번역한 반면, 대부분의 영어 역본들은 “in you”(너희 안에서)로 번역한다. 두 가지 번역 모두 적절하며, 헬라어 구절인 ‘en humin[엔 휴민]’은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한 일은 개인들의 삶에서 시작한다. 다만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살아 내야 한다. 6절의 요점은 개인들이나 전체로서의 공동체 그 어느 쪽으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일은 각 개인이 ‘구원받거나’ 또는 교회 개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역사가 이뤄질 때까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며, 이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의 일은 끝날 것이다.


   바울의 직업은 전도자요 사도였다. 그의 직업에는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성공과 야망을 가늠케 하는 표시들이 있다. 얼마나 많은 회심자(개종자)들을 얻었는가? 얼마나 많은 기금을 모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들의 영적 멘토로 칭송하는가? 당신의 가시적인 사역 수치는 다른 전도자들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이런 것들은 교만과 야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바울도 자기 직업 속에 이런 동기들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만, 오직 사랑만이 단 한 가지 합당한 동기라고 주장한다(빌 1:15-16). 이 말은 이것이 다른 모든 직업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모두 인정과 안정, 그리고 돈을 포함한 성공의 표상을 위해 일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이기적 야망’(NIV; eritieias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부당한 자기 과시’로 번역할 수 있다)에 이르게 한다.[1]

 

  이들은 직업의 목적을 정당하게 달성했을 때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빌 1:18)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동기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을 끝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에는(빌 3:7-14) 동기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단 하나의 동기는 바로 사랑이다.

 James Strong, Enhanced Strong’s Lexicon (Ontario: Woodside Bible Fel  lowship, 1995), G2052

복음에 합당하게 일하라(빌1:2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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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하는 일이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에 어울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능력이 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라는 바울의 권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일반적인 삶이지만, 그가 이 권면에서 일을 배제한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별한 명령을 한다.

 

마음을 같이하라(빌 2:2).

어떤 일이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빌2:4).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런 명령들에 합당하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하는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단락 안에서 말한다(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특히 우리 안에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겸손한 자세로 행해지며, 설령 그 것이 희생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행해진다.

 

"마음을 같이하여" (빌2:2)

 

   세 가지 명령 가운데 첫 번째인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한 몸으로서의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직장에서 그것이 적용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직장 동료들과 항상 마음이 딱 맞을 수는 없다(롬 12:2). 그러나 대부분의 직장에는 크리스천들이 한 명 이상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교회 안에서라면 성경적 · 신학적 · 도덕적 · 영적, 심지어는 문화적인 문제에 의견을 같이하는 공동체에 들어감으로써 서로 구분 지어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직장에서는 그런 문제들에 의견이 다를 수 있는 크리스천과 같이 일해야 한다. 간혹은 우리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를 크리스천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것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하는 간증이나, 직장 동료로서의 업무 효율성 양쪽 측면 모두에서 수치스러운 장애물이다. 신자들인 우리가 비신자들보다 서로 더 어울리지 못한다면, 믿지 않는 우리 직장 동료들이 우리 주님을,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직장 내에서 다른 크리스천들을 찾아내 그들의 신념과 삶의 방식이 어떤지 알아 가야 한다. 아주 중요한 문제에서 서로 의견 일치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크리스천들을 경멸하고 그들과 언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상호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더 나은 간증이 될 수 있다. 최소한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정말로 중요하다는 걸 믿는다면, 함께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우리의 차이점쯤은 기꺼이 옆으로 제쳐둘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빌 2:2)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빌 2:8), 우리도 그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사랑을(빌 2:5)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직장내 다른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과의 관계에도 공통으로 해당한다. 바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직장의 모든 사람은 우리의 일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만약 어떤 크리스천이 “제 역할은 당신을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그 말에 반대를 하겠는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빌2:3)

 

   다른 사람들을 우리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빌 2:3) 사람들의 마음 자세다. 크리스천들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겸손한 마음을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겸손의 궁극적 행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눅 5:32; 롬 5:8; 딤전 1:15).


   직장은 겸손히 섬길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칭찬하는 데는 너그럽고, 실패를 비난하는 데는 인색할수 있다. 당신은 대답할 말을 미리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먼저 귀담아 들어 줄 수 있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승진 또는 고액 연봉을 시기하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점심시간에 그런 시기의 마음을 다른 동료들에게 가져가 털어놓는 대신 그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거꾸로 직장은 이기적인 야망을 이룰 무한한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앞에서 우리가 보았던 대로 야망은 (심지어 경쟁심도) 절대적으로 나쁜건 아니지만(롬 15:20; 고전 9:24; 딤전 2:5), 부당하게 자신의 목표만 추구하는것은 나쁘다. 이는 부정확하고 과장된 자기 진단으로 이어져(“허영”) 당신을 외딴 환상의 섬으로 이끌어 가 결국 일에서도 신앙에서도 효과적이지 못한 사람이 되게 만들 것이다.

 

  이를 위한 두 가지 처방이 있다. 첫째, 당신의 성공 여부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달려 있으며, 또 그들의 성공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것은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진정한 팀워크를 발휘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항상 당신 자신과 당신이 수행한 일에 대한 정확한 피드백을 구하라. 그 과정에서 당신의 성과가 누구보다 탁월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 판단의 근거가 정확하고 객관적이라면 그건 허영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단순한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이미지를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이미지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단, 당신이 정확한 근거에 입각한 피드백을 받았을 때에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신을 학대하거나 속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미지를 의존하는 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비록 자신의 몸은 십자가에서 학대를 당하고 계셨으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그대로 유지하셨다(눅 23:43).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빌2:4)

 

   세 가지 명령 가운데 직장 내 우리의 역할과 조화시키기 가장 힘든 게 바로 이 명령이다. 우리가 출근해서 일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돌보지 않는 행위가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빌 2:4) 말한다. 어쩌면 그는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 돌보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돌본다면 각자의 필요도 채워지리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몸의 비유와 일맥상통한다. 눈 스스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발에 의지해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다. 따라서 각 신체 기관은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자체의 필요 역시 채워진다.


   이것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서로 밀접하게 엮여 있는 공동체, 아마도 모두가 똑같은 수준으로 헌신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있다면 거기서는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을 일반적인 교회 밖 직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 자신의 유익 대신 직장동료와 고객, 상사, 부하 직원, 공급자, 그리고 우리 주변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돌아보라는 의도로 말하는 걸까?

 

  다시 한 번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유익 대신 죄인들의 유익을 구하시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보기로 묘사하는 빌립보서 2장 8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분은 단지 교회가 아닌 세상 전체에서 이 원칙대로 사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삶의 결과에는 고난, 손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빌립보서 2장 어디에서도 직장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돌보는 것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만한 구절을 찾을 수 없다.

초능력자가 되라는 게 아니다(빌2:1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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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립보서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바울, 에바브로디도, 디모데를 예로 든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빌 3:17). 그는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에 근거한 틀 안에서 이들의 사례를 묘사한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대로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으니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변명 뒤에 숨을 수가 없다. 또한 바울, 에바브로디도, 디모데는 우리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초인들이 아니다. 우리 역시 일터로 갈 때 다음과 같이 ‘파송과 순종, 위험을 무릅씀, 다른 사람들을 섬김’이라는 이 동일한 틀 안에 우리 자신을 넣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는 명령을 상식선에서 완화시키는 것은 허용되는가? 가령,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돌볼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의 유익에 더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도 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조화롭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공익을 위해 일하지만,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한 구조일 때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돌보는 것이 괜찮은가? 바울은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 정도로 대담하게 살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딱 한 가지만 말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당신은 오직 하나님께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와 간구, 감사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데 필요한 어려운 결정과 감당하기에 벅찬 행동을 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 신학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과 일에서 실천 가능한 조언이다.

매일의 상황에 적용하기(빌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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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직장과 직접 관련된 세 가지 일상적 상황을 묘사한다. 

 

갈등 해결 (빌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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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두 여인, 곧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화평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빌 4:2-9). 우리는 본능적으로 갈등을 그저 부인하거나 억압하지만, 바울은 애정을 가지고 이 갈등을 터놓고 논의하며 해결하고자 한다. 그 여인들의 불화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두 사람 모두 바울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써온 사람들”(빌 4:3)이라고 말한 신자들이었다. 알다시피 독실한 크리스천들 간에도 불화는 일어난다. 바울은 분노를 쌓아 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빌 4:8).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좋은 점을 알아주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들과 갈등 관계에 있을 때조차 (또는 특히 그럴 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를 위해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와 기도와 간구와 감사, 염려하지 않는 마음(빌4:6)을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직장에서 쉽지는 않지만 분명히 적용할 수 있다. 직장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무시하거나 숨기고 싶을 때, 험담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터놓고 얘기해야 한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좋다. 다만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가 아닌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한다. 우리가 경쟁자와 맞서야 하는 경우, 적어도 그들의 장점이 무엇이든 인정해 주는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을 위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여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그냥 관계를 끝내 버리고 싶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내가 우리의 능력과 인내를 대체하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적 목표를 추구하는 대신 “자신을 비우시고”(빌 2:7), 이에 따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신(빌 2:9) 우리 주님을 본받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면, 그땐 우리의 투사나 두려움, 분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무엇이 진짜 쟁점인가’ 하는 관점에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대개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에서의 관계 회복과 일종의 상호 존중으로 이어진다. 드물게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우리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기대할 수 있다. 깨어진 관계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희망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다.

서로 지원해 주기(빌4:10-1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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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를 개인적으로(빌 1:30), 재정적으로(빌 4:10-11, 15-16) 후원해 준 일을 감사한다. 신약 전체에 걸쳐 우리는 바울이 항상 바나바(행 13:2), 실라(행 15:40), 루디아(행 16:14-15),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를 포함한 다른 크리스천들과 동역자로서 함께 일하려고 애쓴다. 바울의 서신들은 전형적으로 그가 긴밀하게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사로 끝을 마무리하며, (빌립보서가 바울과 디모데가 보낸 것처럼) 보통 바울과 다른 동역자들이 보낸 서신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동역자로 삼아 거의 모든 일을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세상 일터에서 항상 크리스천들과 같이 일하는 호사를 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서로를 지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나 또는 기관에서 부딪치는 특정한 도전이나 기회에 직면했을 때 서로 지원해 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엄마 대 엄마” 프로그램[1]은 직장에서의 상호 지원의 실례다. 엄마들이 매주 같이 모여서 양육을 공부하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서로를 지원해 준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모든 크리스천이 그들이 하는 일을 위한 이런 종류의 지원을 받을 것이다. 따로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없다 해도 우리는 예배와 설교, 성경공부, 소그룹, 교회 수련회, 강의와 휴식 등 일반적인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우리 일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는가? 바울은 생각과 소식, 교제와 자원들을 나누기 위해 장거리 항해를 하는 사자들을 동원하면서까지(빌 2:19, 25) 자신의 소명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www.momtomom.org를 보라

가난과 풍요 (빌4:12-1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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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바울은 가난과 풍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직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바로 일이 가난과 부의 차이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을 해서 월급을 받고 사는 우리들에겐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바울의 충고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당신의 일이 항상 당신에게 풍요를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로 일을 우상화하지 말라. 대신 당신의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동기 삼아 일하고, 적든 많든 그 일을 통해 당신이 제공받는 것에 자족하는 법을 배우라. 정말 따르기 어려운 충고다.

 

   교사나 보건 분야 근로자, 고객 서비스 분야 근로자, 보모 등 일부 직종의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초과 근무를 하면서도 그에 따른 수당을 받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하는 일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기를 기대한다. 계약서나 상여금이란 목표도 없이 일하면서, “나는 고객과 직원, 주주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연말에 회사가 나에게 얼마를 주기로 결정하든, 저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고위 임원이나 투자 은행가를 상상해보라. 그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바울은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 내가 풍족하니..(빌4:12-13; 18)

 

   요지는 우리가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얼마나 많이 또는 적게 받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할 때 다른 사람 또는 우리 자신 중 어느 쪽에 가져다주는 유익으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느냐이다. 그러나 그 동기 자체는 지나친 빈곤이나 풍요의 결과를 낳게 하는 기관이나 관행, 체제에 우리가 저항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결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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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결론 부분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언급하며(갈 6:14)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던 다음 내용을 상기시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무실, 창고, 가게, 회의실을 들어갈 때도 함께하시며,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촉구하고 권능을 부어 주신다.


   크리스천의 삶은 믿음에 근거한 삶이다. 그러나 믿음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수동적 동의가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은 매일의 삶의 경험에서 믿음은 살아 있고 능동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바울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갈 5:6)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행위 모두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갈 5:22) 바로 그때에,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북돋운다.


   우리는 우리의 일로 스스로 의롭다 하려는 종 노릇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일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로 이어진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갈 6:10, 현대인의성경)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행사하는 주요 통로가 돼야 한다. 만약 일터에서 믿음의 열매들을 맺지 못한다면, 삶의 중요한 부분을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잘라 내는 것과 같다.

 

 

에베소서

   에베소서에서는 단지 몇 구절만이 정확히 직장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그런데 그것도 도둑, 종, 그리고 상전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깨닫는다면, 또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직장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선한 일을 하는 주요 무대가 된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하는 일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개인을 위해 예비해 주신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다른 자료를 참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의 유일한 참된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우리 자신과 동료들을 바라볼 때, 직장에서의 대인관계와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에베소서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관점, 곧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죄에서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 사역의 부산물이라는 관점을 갖도록 격려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예수님 뒤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엡 4:1) 반응해서 일한다.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무실, 공장, 학교, 가정, 가게 등 모든 일터에서 우리가 주님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열의를 가지고, NRSV]”(엡 6:7)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정확하게 일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하나님 사역에 가지는 그의 비전은, 우리가 신앙과 일을 고려해 보게 만드는 토대를 놓고 있다.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우리가 살아 내야 하는 주요한 무대다. 우리는 삶과 일터에서 다른 크리스천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낫다고 여기며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바울은 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직장에서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장에서 하는 일은 단지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기 때문에 바울은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