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생수, 예수 (요한복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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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가 여인 이야기(요 4:1-42)는 요한복음 전반에서 나타나는 일에 대한 직접적인 토론이지만, 동시에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그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매일 물을 길으러 오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영생을 주는 말씀의 힘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이미 많은 기독교인에게 친숙하다. 이 주제는 복음서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일상적인 고민과 우려를 넘어서 삶의 영적인 측면을 해결할 수 없는 군중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수님이 기꺼이 자신을 산 떡으로 주실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요 6:51-61). 예수님의 출신지(나사렛 - 요 1:45)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 어디로부터(천국) 오신 분인지는 알지 못하며, 그분이 앞으로 가는 곳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지하다(요 14:1-6).

   이 모든 것은 일에 관해 고민하는 데 의미 있다. 안정적인 물 공급이 주는 본질적인 이로움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그리고 갈증을 느낄 때마다 마시며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낄지라도) 단순히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는 물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못함을 본문은 분명하게 말해 준다. 더 나아가 많은 현대인은 우물가의 여인이 매일같이 물을 길어 올리던 일이 얼마나 고되고 단조로웠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여인이 게으르다고 판단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노동의 저주(창 3:14-19)는 가혹하기 때문에 자기 행위보다 더욱 효율적인 체계를 희망했던 여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를 더러운 세속적인 일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시고, 평온한 영원의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게 만드시려고 오신 것으로 결론 낼 수는 없다. 우선 요한복음 1장에 묘사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의 포괄성을 유념해야 한다. 메시아는 우물의 물도 창조하셨다. 그건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칭찬하신 물이었다. 그 물을 통해 성령이 예배를 사모하는 자의 마음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역사하시는지를 설명한다는 것은 물 자체에 고상함을 부여하는 일이지, 폄하하는 일이 아니다. 창조자를 먼저 생각하고 그 후에 창조물을 본다는 사실은 창조물을 무시하는게 아니다. 우리의 시선을 창조주께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창조물의 목적 중 하나임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본문에 뒤따르는 내용에서도 유사한 묵상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수확하는 은유로 세상 속에서 제자들의 임무를 설명하신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요 4:35-36).

   농사일은 일용할 양식의 통로,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그 축복의 통로가 될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도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이상으로 노동을 직접 예찬하셨다. 우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ergon]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는 말씀을 보라. 성경에서 헬라어 ‘ergon[에르곤]’이 처음 등장하는[1] 구절이 창세기 2장 2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erga]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 [erga]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구절에서 창세기 2장 2절 말씀을 암시하시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 전체 맥락을 기준으로 요한복음 4장 34절 말씀 중 “그[하나님]의 일”이 태초에 하나님이 하신 일의 종합적인 회복이나 완성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간에서 미묘한 메시지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다소 이해하기 애매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눈을 떠서 보기만 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추수할 준비가 된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추수할 밭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노력”을 대신한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가? 애매하다. 놀랍게도 우물가의 여인이 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다. 물론 나중에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했으나, 그것보단 초기 모습, 영적으로 느려빠진 존재로 알려진 그 우물가의 여인 말이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요 4:39). 훗날 제자들은 우물가의 여인이 뿌린 곳에서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다른 한 명의 일꾼이신 그리스도가 있었다.

   요한복음 4장 6절에서는 ‘예수님이 길 가시다가 피곤하셨다’라고 밝혔다. 원문을 직역한다면 ‘예수님이 여정에 수고하셨다’라고도 할 수 있다. ‘피곤하셨다’라는 원문 표현 ‘kekopiak?s[케코피아코스]’는 ‘수고했다’라는 의미다. 이 동일한 어원을 지닌 단어가 요한복음 4장 38절(요한복음에서는 여기 외에 더 사용되지 않았다)에, “너희로 노력하지[kekopiakate] 아니한 것을 ……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kekopiakasin]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 [kopon]에 참여하였느니라”에서 나온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여정으로 지치셨던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추수할 밭이 무르익은 것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수고하시며 일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를 위해 밭을 일구고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봤듯이, 인류의 타락 이후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는 태초부터 계속 이어져 온 창조와 생산의 수고였다. 마찬가지로 그분을 따르는 자의 구속 사역은 물을 긷는 주부나 밭에서 수확하는 농부와 그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맥락을 같이한다. 전도는 사람에게 주어진 여러 일 중 하나로 어느 가사나 농사에 비해 월등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각각 특정한 형태의 일이며 대체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물을 긷는 일과 곡식을 추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전도하는 일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대체하지 않으며 인간 행위 중 가장 가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잘한 일은 창조주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인 칠십인역에 나와 있다.